펑펑!

벌교읍 부용산

기러기러기 2011. 2. 8. 00:46
박기동시인을 아십니까~ 벌교 부용산을 말합니다!!!|벌교사람들
부용 | 조회 94 |추천 0 |2010.05.11. 13:09 http://cafe.daum.net/wkdwhk/A9Bu/73 

 

 

 

부용산 - 박기동

 

 

부용산 오리길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 말 한 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혹시 이 노래의 애절한 가락을 들어본 적이 있는지요? 저는 십 수년 전에 한 선배시인이 술자리에서 부르는 걸 귀담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때도 눈물이 쑥 빠질 만큼 슬픈 노래여서 그 자리에서 술을 몇 잔이나 더 들이켰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 노래는 작사자가 1947년경에 폐결핵으로 죽은 어린 누이동생을 부용산에 묻고 나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작곡자 안성현이 해방 후에 월북을 하고, 후에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이 노래는 널리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근래 들어 가수 이동원, 안치환, 한영애 같은 이들이 음반을 내면서 스러져가던 이 노래응 복원하기에 이르렀지요. 제가 쓰는 문자는 입이 없어서, 당신의 귀에 이 노래를 들려드릴 수 없는 게 안타깝군요. 꼭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슬픔 때문에 당신의 마음이 맑아지게 될 지도 모릅니다. - 100일 동안 쓴 러브레터 2 / 안도현 지음 / 태동출판사

 

부용산

 

詩     : 박기동

작사 : 안성현

노래 : 안치환, 이동원, 박흥우, 국소남, 한영애

참고 : ( ) 안은 안치환이 부르는 가사. 다른 분들은 원곡을 그대로 부름.

참고 : 이동원의 '부용산'은 네이버 블로그 '음악 즐거움 그리고 386' 의 '빙고'님이 파일을 보내 주셨습니다.

 

 

 

 

부용산 - 이동원

 

부용산 - 박흥우(바리톤)

 

부용산 - 국소남

 

부용산 - 한영애

부용산에서/보성 벌교

 

- 나천수

 

 

보성 벌교 땅 부용산에는
24살의 꽃다운 나이에 죽은
박기성씨의 누이가 누워있다고 하여
길 물어물어 찾아가 보았더니

 

누워있어야 할 누이는
어느새 잠에서 깨어
부용산 등산로 입구에
詩碑로 서있구나

 

1947년 요절한 누이의 주검을
부용산 산허리에 파묻고 되돌아서는
오빠의 발목 부여잡고
홀 남겨두고 가지마란 듯이
산새도 슬피 울었다
살점 도려내는 아픔과 슬픔을
주체할 수 없어서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다고
恨의 피눈물 쏟아내면서
詩 한 구절 부용산 잔디에 써놓고

 

누이를 잊은 지
어언 60여년의 세월
부용산에서 내려다보이는 멀리
벌교 앞바다 여자만(汝自灣)은
그때나 지금이나 햇살만 반짝이고 있다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영화필름처럼 돌아가는 동안에
그 시가 노래가 되고
그 노래가 빨치산이 즐겨 부르는
榮辱의 세월 보낸 지금
누이도 시도 노래도
부용산에 산허리에서 부활하여
세상 사람들의 품으로 돌아 왔다

 

누이가 보고 싶을 때마다
부용산 노래를
차마 큰소리로 부르지도 못하고
좌우 이념의 강물이 흐르는
강 언덕 저편에서
입술에서 맴도는 나지막한 소리로
부용산 산허리의 잔디만 푸르다고
고장 난 축음기가 반복하듯
내뱉었을 수밖에 없었으니

 

부용산 산허리는
사람 사는 동네와 접해있어서
마음 답답할 때
바람 쏘이러 가는 언덕배기이다
마치 골고다 언덕처럼
꼭 그 자리 만큼에
예수님의 십자가 서 있듯
부용산 詩碑가 있어서

 

사람들이 詩碑를 보러 가는지
부용산 누이를 보러 가는지
아니면 恨의 상징인 詩碑가
멀리 여자만 남해바다를 응시하는지
부용산 오리길 산허리에
직접 올라가 보아야 알 것 같다.

 

2004년 2월12일 벌교에서

 



▲ 54년만에 누이동생이 묻힌 전남 벌교 부용산을 찾은 박기동 시인

 

 

 

 

 

 

 

타계한 `부용산' 작사 박기동옹

 

“빨치산 노래” 숱한 고초, 93년 호주이민 지난해 귀국

고향 벌교서 연극 등 재조명

 

자신이 만든 노랫말 `부용산'을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숱한 핍박을 받으며 이역만리 타국을 떠돌아야만 했던 벌교출신 박기동 시인이 지난 5월 국내에서 생을 마감한 것으로 뒤늦게 확인됐다.

 

이같은 사실은 부용산의 노랫말과 이데올로기를 조명한 연극이 박 시인의 고향 벌교의 한 무대에 올려지면서 알려졌다..

 

6일 벌교번영회 등 지역민들에 따르면 누이의 죽음을 애도한 `부용산'의 노랫말을 지은 벌교 출신 박기동 시인이 지난 5월9일 향년 88세를 일기로 서울의 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는 것. 그의 시신은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원 내 아내 옆에 안장됐다.

 

박 시인은 지난 93년 가족을 두고 호주로 이민을 떠나 시드니에서 주로 생활해오다 지병인 뇌경색이 악화돼 지난해 9월 아들(54^치과의사)이 있는 서울로 들어와 치료를 받아왔다.

 

벌교번영회 등 지역민들은 박 시인의 빈소를 찾아 박씨를 벌교읍내 부용산에 안장하고 장례를 벌교읍민장으로 치르는 문제를 논의했으나 성사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용산'은 박씨가 1947년 스물네살 꽃다운 나이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누이를 부용산에 묻고 돌아와 쓴 시에 목포 항도여중에서 재직하던 안성현이 1년뒤 곡을 붙인 현대판 `제망매가'.

 

이 노래는 해방과 전쟁 이후 `폐허'라는 당시 상황과 어우러져 당대 최고의 히트곡이 됐지만 한국전쟁 때 작곡가 안성현이 무용가 최승희와 함께 월북한데다 당시 빨치산이 즐겨불렀다는 이유로 숱한 탄압을 받아야만 했다.

 

1957년 목포사범학교 국어교사를 끝으로 교직을 떠난 박 시인이 지난 93년 호주로 단신 이민을 떠나게 된 것도 가택수색과 연금^구금 등 가족 전체가 겪어야 했던 숱한 고난과 무관치 않다는 게 그를 아는 사람들의 지적이다.

 

박 시인은 지난 2000년 10월 부용산 노래비가 벌교읍 부용산 오리길에 세워지고 인기가수들의 음반에 실리는 등 재조명되는 상황 속에서 호주에 머무르며 시로 고국 및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온 것으로 전해졌다.

 

박 시인의 장남은 “아버님의 장례 이후 들춰본 시작 노트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시들이 적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었다”며 “`내가 태어나도 참 좋은 나라. 다시 태어나도 한국에서 살고 싶다'라는 시구를 유언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와 관련 광주^전남 중견연극단체 보성공연예술촌 `연바람'이 제4회 벌교꼬막축제의 마지막 날인 6일 벌교제일고 운동장에서 부용산의 노랫말에 담긴 시대적인 의미와 아픔을 담아낸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이번 연극을 연출한 오성환(42)씨는 “지난 해 10월 충남 공주에서 열린 전국 향토연극제에 `부용산'을 무대에 처음 올렸는데 박시인이 숨져 안타깝다”고 말했다.

 

전남일보 김용재 기자 2005. 11.07

 

 

定說 '부용산'

 

김성우 에세이 /한국일보 1998. 3. 28.


호남인의 애창곡 '부용산'의 내력이 소개되자 여러 애창자들의 호응이 있었다. 定曲없이 입에서 입으로 흘러다니던 노래의 악보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 노래가 50년 동안 초야에 굴러다니면서도 시들지 않고 널리 확산되어 있다는데 놀랐다. 인기 티비드라마였던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양희경이 이 노래를 부르더라는 제보도 있었다.

 

이런 반응속에 커다란 볼멘소리가 섞여나왔다. '부용산'이 목포의 노래로 주장된 데 대해 전남 보성군 벌교읍 쪽에서 이것은 벌교의 노래라는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작사자 박기동 씨가 벌교사람인데다 부용산은 벌교에 실재하는 산이고 노래의 주인공은 작사자의 목포 항도여중 제자가 아니라 벌교의 친누이동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벌교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이면 이 곡을 고향의 노래처럼 합창한다고 한다.

 

'부용산'이 벌교의 노래라는 뒷받침으로는 광주에서 발행되는 '예향'이라는 월간지가 94년에 쓴 기사가 있다고 한 독자가 알려주었다.그 잡지를 구해 보니 현재 전남 순천 낙안의 금둔사 주지로 있는 知虛스님의 증언을 빌려 '부용산'은 작사자가 16세 때 죽은 그의 누이동생을 벌교의 부용산에 묻고 돌아오면서 가사를 지은 제망매가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지허스님의 전언은 출처가 불분명하다.

 

'부용산'의 본향을 다시 찾아나설 수 밖에 없다. 5년전 호주로 이민 가서 시드니에 살고 있는 박기동 씨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 올해 81세인 그의 육성증언의 내용은 이러하다.

 

박씨는 전남 여수의 돌산이 고향이다. 일본의 간사이(關西)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1943년 귀국해 벌교의 남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해방이 된 이듬해 벌교상업중학교로 옮겨 국어와 영어를 가르쳤다. 이무렵 아버지가 벌교로 이사와 있었다. 1947년 박교사는 새로 설립된 순천사범학교로 전근했다. 이 해에 큰 누이동생인 박영애가 순천 도립병원에서 폐결핵으로 죽었다.

 

누이동생은 심성이 곱고 얼굴도 예뻐 천사같다고 소문나 있었다. 1941년 18세 때 벌교로 시집을 갔고 죽은 것은 24세 때였다. 30세이던 박교사는 벌교의 부용산에 누이동생을 장사 지내고 돌아와 순천에서 '부용산'이라는 시를 썼다.

 

이듬해인 1948년 박교사는 목포의 항도여중으로 초빙되어 갔다. 여기서 안성현이라는 음악교사를 처음 만났다. 안교사는 극단적인 낭만주의자였다. 이때 항도여중 3학년에 김정희라는 학생이 경성사범에서 전학해 와 있었다. 특히 문예방면에 소질이 뛰어난 천재소녀였다. 조희관 교장 말이 이 학생에게 국어를 가르칠 선생이 없어서 박교사를 모셔왔노라 했다. 이 해에 이 아까운 소녀가 폐결핵으로 죽었다. 박교사는 장지까지 따라갔다.

 

얼마 뒤 서랍 속에 넣어둔 박교사의 시작노트를 안교사가 몰래 가지고 가서 곡을 하나 붙여 왔다. 그것이 '부용산'이었다. 박교사는 맨 끝 구절인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를 상여 나가는 소리로 만들자고 조언했다.

 

'부용산'은 노래를 잘하던 배금순이라는 상급반 학생이 맨처음 불렀고 금방 전남 일대로 유행해 나갔다. 나중에는 전혀 사상성이 없는 노래이면서도 지리산 빨치산들의 애창곡이 되기까지 했다.

 

곡이 나오자 학생들이 수근거렸다. "박선생님이 정희의 무덤에 가서 울었단다"하는 소문이 퍼졌다. 박교사는 그 때 아직 총각이어서 여학생들한테 인기있는 선생이었다. '부용산'의 주인공이 정희라는 설은 이래서 와전된 것일 것이다. 박씨의 카랑카랑한 전화 목소리는 여기서 끝난다. 작사자 본인의 토로이니 제망매가설을 정설로 굳힐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일말의 의문은 남는다. 누이동생이 결혼까지 하고 24세에 죽었다면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라는 구절은 어색하지 않은가. 박씨는 "시를 미처 다듬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예향'이라는 잡지에는 항도여중 때 김정희의 단짝친구로 '부용산'의 哀弟子曲설을 내세운 경기대 김효자 교수의 기고도 실려있다.

 

김교수는 이 글에서 박교사가 누이를 묻고 읊은 시가 '부용산'이라고 해명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부용산'은 우리에게 의당 사랑하는 친구 정희를 애도하는 노래였다. 부용산이 어디 있은들 무슨 상관이랴. 그것은 차마 일찍이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사람이 묻힌 상징적인 산일 뿐이다"라고 썼다.

 

'부용산'은 '향수'의 가수 이동원이 곧 취입을 한다고 하고 벌교에서는 노래비도 세울 것이라고 한다. '부용산'이 어디 것인들 무슨 상관이랴. 차마 잃어버리기에는 너무나도 아쉬운 노래 하나를 만 50년만에 살려 널리 불려지게 할 수 있다면 족할 뿐이다.

 

 

김성우 논설위원이 부용산의 내력을 추적하게 된 동기

 

'부용산' - 최성각

 

그때 은미가 앵콜을 받아서 노래를 몇 곡 더 부르면서 그 사이에 부용산도 슬그머니 끼어넣어 불렀다는 것을 당시에는 아무도 몰랐다.

'무슨 노래야 슬프고 좋은데...'

마침 옆자리에 앉아 있던 경수에게 내가 물었다.
처음 들어 보는 노래이기 때문이었다.

'얼렐레 저 녀석 저 노랜 잘 안 부르는데 오늘은 이상하다.'
은미의 선배인 경수가 혼잣말처럼 말했다.

'쥑인다 쥑여 앵콜.'

 

국회의원에 나왔다 떨어진 두엽이 플라스틱 소주 됫병을 들고 버스의 좌석 난간에 걸터앉아서 소리쳤다. 노래라면 사족을 못 쓰는 두엽이었다. 앵콜을 외치면서도 두엽은 들고 있던 소주병으로 사람들에게 소주를 따르느라 정신이 없는 눈치였다.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소리쳐 은미에게 앵콜을 청했다. 은미는 마지못해 한 곡을 더 불렀다. 이번에도 흘러간 뽕짝이었다. 미아리 고개 어쩌구하는 노래였던 듯싶다. 머리를 뒤로 묶은 은미는 노래를 부르 때에는 목에 가느다란 핏줄이 돋곤 했다. 이상하게도 목의 가느다란 힘줄이 노래 부르는 그녀에게 어울렸다. 어딘가 처연하면서도 그 처연함이 낯설지 않았던 것도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청바지에 체크 무늬의 푸른색 나방 그리고 두껍지 않은 회색 스웨터 차림이었던 은미는 어떻게 봐도 서른이 넘은 노처녀로는 보이지 않았다.

 

대개 산삼 심기 행사는 1박 2일로 진행되었고 성루을 빠져나갈 즈음 사람 소개가 끝나면 소주잔이 오가고 노래들이 터져나오곤 했는데 그때 강원도 정선 산행도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 농심마니 패들에 합류한 은미에 대한 소개는 면목동에서 한의원을 개업하고 있는 경수가 맡았다.

 

은미는 경수의 한의과 후배로서 아직 학생이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노처녀라는 것이 경수에 의해 특별히 강조되었다. 그러나 한의과에 다니는 아리따운 노처녀보다도 그녀가 강압에 의해 부르게 된 노래로 인해 은미는 더 시선을 끌었다. 전날 정선으로 내려올 때에도 은미는 앵콜을 받았었다. 은미가 부르던 노래는 한결같이 노래가 생긴지 오래되었건만 여전히 되불려지고 있는 노래 그러니까 흘러간 트로트였다. 비내리는 고모령 울고 넘는 박달재 황성옛터... 는 물론이었고 나중에는 심수봉에 이르기까지. 그런데 그 뽕짝이 예사로운 뽕짝이 아니었다. 고속도로 휴게실에서 어김없이 흐르는 메들리 뽕짝 가수들은 저리 가라 할 수준이었던 게다. 음정과 박자도 정확했고 끌 때에는 끌었고 당길 때에는 당겼고 넘어갈 때에는 꼴가닥 넘어갔으며 알던 가사도 잊어버리는 노래방 시대에 가사도 너무나 정확해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배로 부르는지 목으로 부르는지 알 수 없었으나 그렇잖아도 노는 일이라면 모두 내로라 하는 농심마니 패들이 은미에게 환호하는 모습이라니 가관이라면 가관이었다.

 

농심마니란 산에 산삼을 심는 사람들이라는 말로서 산삼을 캐는 사람들을 뜻하는 심마니와 달리 그 말이 생긴 지 10여년이 조금 넘는 조어였다. 국운 쇠퇴와 참혹한 일제강점 그리고 미증유의 동족상잔 그 후 미완의 혁명을 깔아 뭉갠 5월 쿠데타를 필두로 길고도 긴 군부독재로 점철된 우리 현대사가 공교롭게도 산삼의 씨가 마르는 것과 궤를 같이했다는 다소 엉뚱스러운 역사의식에서 비롯된 산삼 심기는 자연을 잡아먹으면서 건강을 사려는 이기적인태도가 아니라, 산삼을 심음으로써 우리 땅의 정기를 되찾고자 하는 취지에서 발상된 작은 문화운동이었다. 독서회 친구들과 가까운 산꾼이 중심이 되어 나 또한 모임의 시작부터 관여하고 있는 농심마니는 산삼의 묘삼을 산에 심되 심은 자가 캐먹지는 않는다는 이타적인 정신을 근간으로 삼고 있었다.

 

환쟁이 글쟁이 얼농인 환경 운동하는 사람들 산악인 농사꾼 장사꾼 전교조 교사 일반 직장인들...로 구성된 모임은 봄 가을 벌이는 두 차례 산삼심기 행사에 한 번이라도 참여하면 그대로 정식 멤버가 되어버리는 말하자면 까다롭지 않은 열린모임이었다. 워낙 모임의 들락거림이 수월해 장안의 내로라 하는 날건달과 술꾼들이 다 기웃거리다 보니 산행 언저리에 술로 인한 잡음도 더러 있었지만 산삼 심기가 어언 10년이 넘도록 지속되자 이제는 단순한 임의 모임이 아니라 산삼을 심는 그 행사가 제법 사회적 의미도 띠게 되었다. 그 동안 스물세 차례의 산삼 심기를 통해 농심마니패들이 전국 골골샅샅에 심은 산삼의 묘삼만도 수만 뿌리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심는 것은 산삼의 묘삼이지만 보이지 않게 심어지는 것은 그것만은 아니게 된 것이다.

 

은미가 선배를 따라 처음 참여했던 그때의 산삼 심기 장소는 정선 하장의 야산이었다. 숙박과 식사는 동면 몰우대 언저리 숲에서 농사를 짓고 있던 강원도 친구가 준비했다. 도착한 날 밤에도 장작에 불을 붙이고 거나하게 술판이 벌어졌는데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 은미는 생글생글 웃기만 할 뿐 별로 말이 없었다. 대개는 선배인 경수 옆에 붙어 있었지만 가끔씩은 무리에서 떨어져 홀로 어둠 속에 가만히 서있곤 했다. 일부러 말을 붙여보지는 않았지만 한마디로 인상이 깨끗한 아가씨 였다. 그러나 그 나이 또래의 아가씨들 누구나 자세히 보면 의당 느낄 수 있는 그늘도 언뜻언뜻 느껴지는 아가씨였다. 어떤 젊은인들 그늘이 없으랴.

 

'무슨 아가씨가 노랠 저렇게 잘해.'
농심마니 대장이면서 산악인인 박인식 선배가 경수에게 물었다.

'저 솜씨가 하루 이틀을 생긴 게 아니라 그래요.'
경수가 박 선배에게 대답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물었다. 같은 연배인 경수와 나는 같은 독서회 회원이었다. 말하자면 농심마니 창설멤버인 셈이었다.

'아버진 쟤가 초등학교 다닐 때 돌아가신 모양이야. 그리곤 꽤나 어렵게 학교를 다닌 모양인데 저 녀석이 어렸을 때부터 일 나갔다 돌아온 어머니에게 매일 밤 뽕짝을 불러 드렸다는 거 아냐.'

'어머니에게 뽕짝을 불러 주다니.'

'그것도 이불 속에서 말야. 나도 맨 처음 그 얘기 들을 때 콧날이 징하더라구. 나중에야 사정을 알게 됐지만...'

 

경수의 말은 들을수록 오리무중이었다. 은미는 미아리 고개...에 연이어 으악새 우는 사연...을 한 번 더 뽑고 있었다. 박 선배와 나는 말없이 은미의 노래를 들었다. 더 이상 경수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그 정도 정보만으로도 짐작이 전혀 안 되는 일은 아니었다.

산동네 어느 사글세방에서 낮의 막일로 피곤에 지쳐 누운 어머니에게 흘러간 뽕짝을 나직이 불러주는 소녀의 모습이. 딸의 노래를 듣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던 어느 홀로 된 여인의 모습이... 어머니가 잠든 뒤 다시 공부를 좀더 하고서야 잠자리에 들곤 했던 어린 소녀의 모습이...

'나인 몇이야.'
'서른둘인가 그럴 거야. 무슨 전문대학에 다니다가 때려치우고 한의과대학에 다시 시험쳐 들어왔으니깐 보기엔 저레 갸냘퍼 보여도 아주 독족이야 독종.'

'지금은 살기 좀 나아졌고.'
'아버지 돌아가시고 어머니가 리야까도 끌고 막일도 했는데 이젠 영등포 근처 어느 재래시장에 과일 노점사을 하나 가지게 된 모양이야. 그치만 공분 아마 쟤 혼자 벌어서 하다시피 했을 걸. 이젠 곧 졸업이니까 개업도 개업이지만 결혼을 해야 할 테네 말야.'
경수본디 잔정이 많은 친구였지만 경수의 어투에 은미에 대한 남다른 정이 담겨
있음을 어렵잖게 느낄 수 있었다.

 

'대단한 아가씨로군.'
박 선배가 마치 마침표를 찍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뿐이었다.

노래와 거듭 돌아가는 소주잔 귀경하는 버스 속이라는 게 늘 그렇긴 하지만 그런 난장판 비슷한 분위기였기 때문에 나는 은미가 그때 흘러간 뽕짝 사이에 슬며시 끼워 넣듯이 불렀던 그 노래에 대해 더 이상 경수에게 묻지 못하고 말았다.

 

다시 부용산을 듣게 된 것은 공교롭게도 그 다음 농심마니 산행 때였다. 부용산을 들려준 사람은 그 또한 한 사람의 농심마니이면서 한겨레신문사의 논설위원인 김종철 선배였다.

 

봄 가을 일 년에 두 번 치르어지는 산삼 심기는 지난 번 정선행에 이어 이번에는 정읍 내장산 언저리로 잡혔다. 이번 산삼 심기에는 서울을 들락거리며 10여 년쯤 전 우리 땅에 산삼을 심자고 처음 제창한 울릉도 사람 '고 이덕영'이 발해의 해양활동 탐사라는 기치를 내걸고 블라디보스톡에서 뗏목을 타고 부산으로 흘러 내려오다 태풍으로 일본 오끼 섬 근처에서 조난당한 데 대한 위령제도 곁들여졌다. 고인이 서울에 오면 동식서숙하던 패들이 바로 박선배를 포함한 산꾼들이었던 것이다. 나야 산꾼은 아니었지만 10여 년 전 잡지사 시절부터 박 선배와 가까이 지내던 사이였고 고인 또한 그렇게 흐르던 인연 속에서 마침내는 한겨울 남의 나라 앞 바다에서 세상을 뜨고 만 것이다.

 

더욱이 고인이 뗏목의 난간에 한쪽 다리를 묶어 배가 전복될 때 정강이뼈 언저리가 절단되어 두 동강 났다는 뒷이야기는 그 비장함이 사람의 마음을 후벼 파는 바가 있었다. 위령제와 산신제가 함께 올려졌고 지난해에만 해도 같은 산행에 있던 사람이 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 수 없게 된 분위기 때문에 이번 산삼심기 산행은 전에 없이 무거운 기운을 감출 수 없었다. 아니 무겁다기보다 지인의 비장한 죽음이 가져온 숙연함으로 인해 타성적으로 살며 켜켜이 쌓인 마땅히 벗겨져 내려야 할 때가 벗겨진 듯한 씻긴 감정도 어쩌면 없지 않았다 해야 할 것이다.

 

'부용산이라는 노랠 알고 있는지 모르겠네. 전라도 사람들은 웬만하면 이 노래를 거의 다 알지. 오랫동안 빨치산 노래로 알려져 왔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고... 내가 이 노래를 알게 된것은 쫓겨다닐 때부터였는데 관심 있는 사람들은 얼마 전에 한국일보 김정우 선생 칼럼에 자세히 소개되기도 했으니 서울가면 한번 찾아보도록.'

 

버스의 앞쪽에 앉아 있던 김 선배였다.

낮고 분명한 목소리도 그렇지만 또박또박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말하는 것을 그대로 글로 옮겨도 문장이 되는 김 선배 특유의 방식은 언제나 듣는 이들을 새삼스럽게 긴장시키곤 했는데 이번에도 그러했다. 이음씨나 어찌씨조차 그는 매우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발음하곤 했는데  사실 그런 사람이 그리 많은 편은 아니었다. 쫓겨다닐 때부터라는 말은 그의 언론민주화 활동과 그로 인한 수난을 오래 전부터 잘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는 말이었다. 민주화운동을 한 사람들의 순정성이 그들의 이력과 그대로 일피하는 것은 아니지만 번역에 문학평론도 한 언론인인 그가 정확하게 말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세상을 보고 읽겠다는 의지와 무관하지 않게 느껴지곤 했다.

 

부용산 오리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 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일요일 밤시간이라 귀경하는 밤 버스의 속력은 그다지 빠른 편은 아니었다. 김 선배가 버스의 앞쪽을 향해 앉아 있었기 때문에 노래 도중에 간간히 마이크의 잡음이 더러 섞였지만 노래는 처연하면서도 아름다웠다. 애상이 가슴을 찌르고 있었지만 틈이 없는 격조를 유지하고 있었다. 노랫말에서는 빨치산 노래라는 노래의 위명과는 달리 뚜렷한 사상성을 발견할 수 없었다.

 

누군가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가버렸는데 그의 존재가 안타깝게도 결실을 맺지는 못한 모양이라는 것 그리고 부용산 오리길의 숲과 거기 푸르디푸른 하늘은 노랫말이 겨냥하고 있는 대상의 처연한 비극미가 강조되어 있는 듯했지만 흔들리는 버스에서 들은 김 선배의 딱 한 차례 노랫소리로는 그러나 곡의 이해에 만족할 만큼 가까이 갔다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그 노래가 왠지 처음 들어 보는 노래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는 점이었다. 노래를 마친 김 선배는 이번 모임에 처음 참여한 뒷자리의 젊은이들에 의해 그가 전날 정읍으로 내려올 때 불렀던 노래 꽃밭에서나 내가 만일 따위의 지정곡 앵콜로 들어갔다. 뒷자리의 젊은이들은 빨치산 노래 따위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듯했다. 김 선배는 마지못해 앵콜 곡 중 내가 만일을 한 번 더 부르기 시작했다.

'귀에 익어 왠지.'
옆자리에 있던 세경에게 내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지난 번 은민가 그 아가씨가 불렀었잖어. 거 왜 경수 후배 한의과 다닌다는 노처녀 말야. 이번엔 안 왔네 그 아가씨.'

농심마니 산행에 거의 빠지지 않는 출판업을 하는 세경이 말했다.

 

세경은 은미가 이번 산행에 빠졌음을 이미 확실하게 짚고 있었던 터였다. 그 순간 나는 얼른 고개를 뒤로 돌려 경수를 찾았다. 내가 앉아 있던 자리 앞쪽으로는 경수가 안 보였기 때문이었다. 경수는 내가 앉은 바로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내가 그를 찾는 눈치이자 그 또한 내 쪽으로 몸을 당겼다.

 

'바로 저 노래야.'
경수가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그리고는 들고 있던 종이컵속의 소주를 비운 뒤 내가 컵을 건넸다.

 

'저번에 은미가 불렀던 노래가 저 노래지.'
소주를 받으면서 내가 물었다.

 

'응 부용산.'
그가 짧게 답했다.

 

그는 지나 번 산행 때 은미의 노래가 끝난 뒤 내 질문에 답하지 못했음을 기억하고 있었다.

'근데 놀랍다. 김 선배가 어디서 노랠 배웠는지 거의 원형에 가까운 것 같애. 은미 부용산이랑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구말야. 언젠가 한번 송영 선생 노래를 들었었는데 김 선배 부용산이 송 선생 부용산과 거의 흡사한 것 같군. 사실 나도 원형이 어떤 건지 잘 모르지만 말야.'

 

원형에 가깝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앉아 있던 자리에서 일어나 경수의 옆쪽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나는 부용산이라는 빨치산 노래에 내가 전에 없이 흥미를 품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관심이 노래에 대한 관심이었는지 은미에 대한 관심이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송영 선생이라면 소설 쓰는.'
경수에게 술을 따르며 내가 물었다.

'응.'
경수가 짧게 대꾸했다.

 

만나 인사를 드린 적은 없지만 송선생의 음악에 대한 조예는 알만한 사람이라면 아는 일이었다. 그라면 충분히 부용산을 접하고도 남음이 있다는 생각이 어렵잖이 들었다.

 

'송영 선생 말고도 김지하 선생이나 황석영 선생도 즐겨 불렀다는 소리가 있어. 당연한 일이지만 말야. 근데 정곡이 없어 아직. 모두들 악보 없이 입에서 입으로 배웠기 때문일거야.'
경수가 혼잣말처럼 덧붙였다.

 

그러구 보니 부용산을 부를 줄 알 리라고 떠오르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아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로구먼.'

'응 남쪽 사람들은 엔간하면 이 노랠 다 알어. 운동권 애들도 덩달아 따라 부르고...' 경수의 설명이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를 알고 있다는 데에 왠지 실망스러운 기분이 안 드는 것도 아니었다. 김 선배가 부른 안치환의 노래가 거의 합창처럼 어우러져 끝나자 함께 노래를 불렀다는 상기된 감정이 김 선배에게 다시 노래를 청하게 했다.

 

'앵콜 김 선생님 어제 그 노래 있잖아요 정훈희 노래.' 뒷좌석의 젊은이들이 소리지렀다. 어제 그 노래 중의 정훈희 노래라면 '꽃밭에서'였다.

 

'무슨 앵콜은 앵콜 다른 사람 노랠 듣지 뭘. 경업이 어디 한번 네팔가나 불러 보지.'

'네팔가라면 언젠가 히말라야 트레킹 때 어디로 갈거나로 시작되는 우리 노래를 보지산 봉알봉에 좃씨를...' 어쩌구 하는 네팔가를 발정난 수캐처럼 그러면서도 구성지게 불러제꼈다.

'은미는 그 노래를 어떻게 알게 됐지 어린 녀석이.' 내가 물었다. 나는 네팔가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다.

'걔 아버지가 빨치산이었어.'
경수가 대답했다.


빨치산이라는 말은 그 말이 쓸데없이 그리 자주 쓰이지는 않는다 해도 꼭 써야 한다면 스스럼없는 일상어가 되어 버렸다는 감도 그리 틀린 감이 아닐진대 그럼에도 지루하고 맥 빠지는 일상의 공기에 갑자기 탄력을 실을 정도의 환기력은 여전히 지나고 있었다.

 

'아하.'
나도 모르게 낮은 신음소리 같은 것이 베어 나왔다.

 

버스가 좌우로 흔들렸다. 갑자기 버스가 긴장을 하는 것 같았다. 호남고속도로와 경부고속도로가 만나는 회덕 인터체인지를 지나는 모양이었다. 그 구간은 공사 때문에 급한 커브가 유난히 많은 구간이었다.

 

'그치만 어떻게 된 거야 나이가 안 맞잖어.'
한참 있다가 내가 다그치듯이 물었다.

은미가 빨치산의 딸이라면 그토록 어릴 수가 있느냐는 이야기였다.

 

'아버지가 전향을 하고 나왔거던. 그러니까 은미는 출소한 뒤에 낳은 자식이지. 그게 첫결혼이기도 했지만 말야.'
경수가 담배를 피워 물었다.